정신이란 무엇인가? 일상 언어에서 정신이란 육체나 물질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마음이나 영혼을 가리킨다. 독일의 철학자 쉘러(Max Schller)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적인 특징은 정신(Geist)이라고 했다.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여겨온 언어나 지능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 고유의 특징은 아니라고 했다.
비록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귀천이 없지만, 우리가 특별히 충무공, 슈바이처, 도산, 이태석 같은 분들을 추앙하는 까닭은 그들이 지닌 숭고한 정신과 고귀한 삶 때문이다. 정신은 보통 말과 글로 표현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이나 글은 공허하다.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은 사이비 지식인들의 언어는 거짓이며 세상을 혼란하게 할 뿐이다.
여기서 ‘도산정신’이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온 삶에 녹아있는 핵심 가치이며 일관된 삶의 원칙이며 행동 원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특별히 계승해야 할 도산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힘과 정직 그리고 통합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과 삶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도산정신의 핵심이다.
힘을 기르소서
“내가 이에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것이외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습니다. 독립할 만한 자격이라는 것은 곧 독립할 만한 힘이 있음을 이름이외다. 세상만사에 작고 큰 것을 막론하고 일의 성공이라는 것은 곧 힘의 열매입니다. 힘이 작으면 성공이 작고, 힘이 크면 성공이 크고, 힘이 없으면 죽고 힘이 있으면 사는 것이 하늘이 정한 원리요 원칙이외다.”
1921년 상하이에서 도산 선생이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16세의 소년 안창호가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 시가지를 목격하고 울분을 달래며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얻은 결론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이든 국가든 독립된 인격과 주권을 유지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이때의 각성은 도산 선생의 평생을 지배한 신념이 되었다.
도산이 생각한 힘이란 무엇인가? 그는 돈과 지식과 신용(정직)이 힘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 후 힘을 기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3대 자본축적론’을 제창했다.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아니하고 진실하여 ‘신용의 자본’을 동맹저축 합시다. 한 가지 이상의 학술이나 기능을 배우고 익혀 전문 직업을 감당할 만한 ‘지식의 자본’을 동맹저축 합시다. 각기 수입의 10분지 2 이상을 저축하여 금전의 자본을 동맹저축 합시다.” 이것이 힘을 기르는 구체적 방법이다.
안창호는 먼저 ‘나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고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가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도산은 학교를 졸업하던 1897년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향에 돌아와 점진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하면서 황무지개간 사업을 병행했다.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
도산은 1902년 큰 뜻을 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동포들의 열악한 삶의 현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지도하는 일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리버사이드로 가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파차파 캠프’를 세워 한국 근로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생활공동체를 조직하여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을 건설했다.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농장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거짓말하지 말자, 놀지 말자
1907년 조국의 앞날이 위태로움을 보고 귀국한 도산은 민족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도자기회사를 설립하고, 태극서관을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는 등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계기로 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더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 또다시 조국을 떠나야 했다. 애국지사들이 칭다오에서 만나 중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회담이 결렬되었다.
도산은 페테르부르크-베를린-런던-뉴욕-시카고를 거쳐 1911년 9월 말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도산은 해외 국민회 총회를 통합하여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에 취임했다.
도산은 그동안 많은 단체를 조직하고 사업을 추진하면서 동포 간의 불신과 분열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했다. 가뜩이나 힘없는 민족이 시기와 질투, 중상모략, 지방색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분오열되어 적은 힘마저 분산되어 제대로 일을 도모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이 가죽과 뼈에 젖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대하고 일에 임함에 속일 궁리부터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도산이 체험한 민족의 실상을 비통한 마음으로 토로한 것이다. 도산은 “무엇을 하든지 근간(根幹)이 되는 것은 인격”이며 ‘인격혁명’ 없이는 아무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913년 5월 도산은 인격 훈련을 주된 목적으로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그 무렵 도산은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민족 운동의 방략을 구상했다. 기초 단계에서 준비단계를 거쳐 독립을 쟁취하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최종 단계에 이르는 5단계 ‘민족운동방략’을 수립했다. 그 첫 단계인 기초를 닦기 위한 조직이 바로 흥사단이다.
흥사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이라고 약법에 명시되어 있다.
흥사단의 목적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이라는 원대한 사업의 기초를 준비하는 데 있다. 그 기초라는 것은 무실역행을 생명처럼 여기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인격훈련과 단결훈련을 철저히 시키는 것이다. 무실역행을 도산은 ‘거짓말하지 말자, 놀지 말자’라고 쉽게 풀이했다. 도산의 인격 훈련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 일이 시급한데 어느 세월에 인격 훈련이나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도산이 말하는 인격 훈련은 성인군자와 같은 고매한 인격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여 서로 믿고 더불어 협동할 수 있는 그런 인격을 말한다. 또한 인격 완성 후에 독립운동하자는 것도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인격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독립운동도 정직하게 인격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했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도산은 나라를 망하게 한 가장 큰 원수가 거짓이니, 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한다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는 독립의 적이라고 했다. 거짓말하는 자, 무위도식하는 자는 곧 국가의 원수이며 독립의 적이다. 대한 민족을 참으로 건질 뜻이 있다면 그 방법을 멀리서 찾지 말고 먼저 우리 내부의 적, 즉 거짓을 버리고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모시어야 한다고 했다.
도산은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직이 현실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리버사이드의 귤 농장에서도, 멕시코의 애니깽(용설란) 농장에서도 동포들이 속임수를 쓰다가 결국 일자리를 잃었다. 도산의 지도로 정직하게 일하여 신용을 회복하자 소득도 늘고 생활이 윤택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도산은 지도자에게 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민족 운동을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시비를 들어서는 아니 된다. 동포가 백만의 대금을 의심 없이 맡길 만하고, 과년의 처녀를 안심하고 의탁시킬 인물이라야 비로소 동포의 신임을 받고 또 모범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 털끝만큼이라도 부정하거나 불순한 동기나 수단이나 재물이 섞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특히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통일되어야 합니다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은 흥사단의 2대 강령이다.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은 흥사단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단결’이란 말 앞에 ‘신성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은 단결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소인은 무리를 지어 일을 꾸민다. 그래서 ‘소인배’라 한다. 패거리를 지어 나쁜 일을 꾸미거나, 무리를 지어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결속을 다진다. 그래서 ‘소인배’란 말은 있어도 ‘대인배’란 말은 없다. 한국의 정치판에는 ‘소인배’와 ‘정상배’는 많아도 대인과 정치가는 드물다. 소인배나 정상배의 단결은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언제든 해체된다.
도산이 ‘신성단결’이라고 한 것은 집단의 이익 추구를 위한 단결이 아니고, 민족의 대업과 대의를 위한 단결을 강조한 것이다. 안병욱 교수는 ‘도산은 조직의 명수’라고 했다. 도산이 평생 수많은 단체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여러 사람이 협동하면 더 큰 힘을 낼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단결을 중요시하고 신성한 단결을 강조했다.
도산이 ‘통일’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자주 사용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이후부터다. 그전까지는 ‘단결’ ‘대단결’ ‘합동’ ‘공동주의’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도산이 강조한 통일은 오늘날의 통합과 유사한 말이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 세력 간에는 분열과 대립이 적지 않았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대립이 심각했다.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에는 다양한 파벌과 세력이 이념과 노선과 출신 지역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대립했다.
1919년 5월 25일 도산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와 서울에 각각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대립과 파벌싸움이 격화될 것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대표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도산은 이미 상하이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취임할 수가 없었다. 5월 26일, 6월 4일, 6월 25일로 이어지는 연설에서 계속 통일을 역설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단합하여야 합니다. 세계가 지금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좋더라도 통일을 잃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스스로 통일을 방해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국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충신이 되고 맙니다.”
“나는 내무총장으로 있는 것보다 한 평민이 되어 어떤 분이 총장이 되던 그분을 섬겨서 우리의 통일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도산은 각지의 임시정부 영수들을 상하이로 모아 임시정부의 통합을 추진할 것을 전제 조건으로 5월 26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했다. 곧바로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독립운동 방략’과 6대 사업을 선포하고, ‘연통제’와 ‘임시사료편찬회’를 설립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그리고 3개월여의 노력 끝에 9월 6일 통합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자신은 ‘노동국 총판’이란 말직으로 내려앉았다. 이런 방식이 도산이 솔선수범한 통합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또다시 파벌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도산은 1921년 5월 임시정부를 사퇴했다. 그 후 도산은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대독립당운동을 추진했으나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그 무렵 도산이 제창한 대공주의(大公主義) 역시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하여 힘을 합하자는 뜻이다. 민족적 큰 사업을 위하여 집단의 이해를 넘어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산이 온 삶을 바쳐 강조하고 실천한 일은 오직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힘 있는 국민, 힘 있는 나라를 건설하여 세계의 모범 국가를 만드는 것이 도산의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성한 단결과 통합이 필요하며, 신성한 단결을 위해서는 정직과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말자. 놀지 말자. 단결하자. 통합하자.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도산정신의 핵심이다.